신라 제56대 마지막 경순왕
재위 927~935년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한다. 935년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강원도 경천묘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에 있는 경순왕의 영당이다. 귀래면의 귀래는 귀한 사람이 오셨다는 뜻으로 원주시에서 경천묘를 복원 할 때 귀래면 지명의 뜻에 따라 이곳을 복원하였다. 원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이 경천묘를 보기위해 많이 몰려든다.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재위 927~935)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이다. 2008년 3월 발족한 원주시 향토유적보호위원회가 원주시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하였다. 경순왕은 신라를 태조 왕건에게 넘기고, 원주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으로 들어가 학수사와 고자암을 세웠다. 그때 한 화승이 그린 경순왕의 영정을 고자암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이 영정각의 시초였고, 영조13년에 이르러 경천묘라 이름 붙였다 한다. 원주시는 18세기 말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경순왕의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제작하고, 경천묘를 복원시켰다. (출처 : 강원도청)
경남 하동 경천묘
경순왕(?∼979)의 초상화를 모신 곳으로 1902년 지은 건물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은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준 뒤, 왕건의 큰 딸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국가를 고려에 넘기려 하자 큰아들인 마의태자는 반대하고 막내아들인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경순왕은 용화산 학수사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그 뒤 사람들이 왕을 추모해 학수사에 사당을 세워 모셨으나 후세 사람들이 청암면 중이리 검남산 밑으로 옮겼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8년에 하동댐 건설로 다시 옮긴 것이다.(출처:경상남도 하동군 문화체육과)
군자봉 성황제
2002년에 지정된 시흥시 향토유적 제14호로 매년 음력 10월 3일이면 신라마지막 경순왕을 군자봉에 성황신으로 모시고 마을의 번영과 주민의 안녕을 비는 성황제가 열린다. 후삼국시대가 끝날 무렵 신라의 경순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을 한다. 경순왕과 경순왕비인 안씨는 경주를 떠나 왕건이 있는 개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잠시 이곳에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 경순왕이 죽은 뒤 안씨부인이 이곳 군자봉에 올라와 치성을 드리니, 꿈에 경순왕이 나타났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안씨부인도 죽었다. 얼마간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외교관이라 일컬어지는 서희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신단을 이끌고 가는 서희의 앞에 안씨부인의 영혼이 나타나 사행길을 안전히 갈 수 있도록 지켜 주었다 한다. 그 공으로 군자봉에는 경순왕과 경순왕비를 모시는 성황당이 지어지고 마을 사람들이 매년 제를 지냈다.
<출처:한국의 해양문화-서해해역 당설화>
군자봉
군자동에 단정(端正)하게 솟아 있는 산이 군자산 또는 군자봉이다. 해발 199m 높이의 산으로 산세는 서쪽으로 옥녀봉을 거쳐 정왕산 (일명 봉우재산. 봉화산) 바닷가에 이어졌고 남쪽으로는 환자산 동남쪽으로는 관창산으로 이어진다. 군자산에 명칭 유래는 지지서에 (小人中君子는 鶴立鷄群이요, 君子中 小人은 蓬生麻裡니라 소인 가운데 군자는 학이 계군에 우뚝선 것이요, 군자중에 소인은 연(쑥)이 마속에 생한 것이다.) 즉 주변 모든산이 산만한 가운데 그중 일산(一山)이 단정출중(端正出衆)함을 이르되 小人中 君子라 일컸는데서 연유 되었거니와 일설에 조선조 제 6대 임금인 단종(端宗)이 木內里(현 안산시 목내동)에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묘소(墓所)를 참배하고 가는 길에 이 山을 보고 산봉우리가 마치 연꽃처럼 생j으로 개칭하였다. 과연 산 이름대로 군자봉(君子峰) 정기를 타고난 사람들은 도처에 거주함에 있어서도 군자지풍(君子之風)과 군자지덕(君子之德)을 겸비하여 타의 모범으로서 군림하고 있다. ⊙ 君子峰에 얽힌 傳說
경새제민의 경륜을 간직하면서도 국가와 백성의 안일을 위하여 스스로 왕관을 벗어버리고 신라 千年의 사직을 손국(遜國)한 신라의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대왕(敬順大王)과 안씨빈(安氏嬪)의 얽힌 애환과 서희장군과의 사연을 담은 안산시 성곡동 성황당이 있다. 그리고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의 성황당은 천여년을 내려오면서 10월 상달이 되면 원근의 백성들이 경순대왕의 추모제를 지내왔다. 때는 후삼국 전란이 극에 달한 935년 신라사진을 고려에 손국(遜國)하고 평민이 된 경순원은 신라를 다시
부흥하고자 구국을 외친 마의태자가 월악산·설악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간 것과는 달리, 신라 경주를 떠나 충북 제원군 고산사에 머무르다가 동군 백운면 도곡리에 이궁(離宮)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강원도 우너상군 귀래면 주포리 미륵산 고자암에 미륵불상을 조성하였고, 또 그곳을 떠나 충남 보령군 옥마산에 머무르면서 대천시 왕대산 왕대사에 또 미륵불상을 조성고, 다시 그곳을 떠나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이 이거(移居)하면서 安氏 (안씨빈)과 생활하다가 득남하게 되었으니 그 아들의 이름을 德勢(덕세)이라 하였다.(提川郡誌제천군지). (三國遺史삼국유사). (新羅汎金氏史신라범금씨사). 그러나 경순왕은 고려 수도인 개성에 있는 딸 德周公主덕주공주)가 보고 싶어 개성에 갔다가 사위였던 고려조 5대 景宗王宮(경조왕궁)에서 83세로 逝去(서거)하였다.
이러한 소식을 모르고 기다리던 안씨빈은 안산 땅에서 孤魂(고혼)이 되었으니 그 恨(한)과 외로움은 하늘에 사무쳤다. 한편 경순왕의 상여가 개성을 떠나 경주로 행차하는데, 新羅貴民(신라귀민)들이 모여들어 呼哭(호곡)하는지라 高麗朝(고려조)에서는 혼란을 염려하여 경주행을 중지하고 경기도 장단군 백학면 고랑포에 下棺(하관)하니 이것이 고랑포 敬順王陵(경순왕릉)이다.
그로부터 3년 후 宋(송)나라 사신으로 徐熙(서희)장군이 출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安氏嬪(안씨빈)의 영혼이 나타나 그에게 많은 奇行異蹟(기행이적)으로 행차길을 도와주었다. 안씨빈의 顯靈(현령)과 서희 장군은 약속하기를 안산 군자봉에 경순대왕의 影幀(영정)과 안씨빈의 所願當(소원당)을 지어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희 장군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두 곳에 성황당을 지어 주었다. 이로 인한 성황당이 현재에도 두 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조에서는 그의 外交功行(외교공행)에 안씨빈의 도움이 있었다하여 안씨빈이 살던 獐口郡(장구군)을 案山郡(안산군)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빈 영정 및 안씨빈 친가 어머니인 洪氏(홍씨)부인 혼령에게 천여년간을 한 해도 빠짐없이 군자봉에서 洞祭(동제)를 지내오고 있다.
북형산성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는 7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포항 못미쳐 오른쪽에 국당2리 마을이 있고, 마을 뒤에 해발 265m의 북형산이 있다. 주위의 산보다 높기 때문에 형산(兄山)이라 부르고 있다. 이 지역은 형산강 하류에 해당되는 곳으로 옛날에는 이 부근에 배를 될 수 있는 형산포(兄山浦)가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현재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이곳이 북형산 북쪽의 제산(弟山)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어느 때 큰비로 인해 이 일대가 물에 잠겼는데, 경순왕이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꼬리를 쳐서 현재와 같이 형산과 제산으로 나누어져 이 일대를 홍수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로 인해서 경순왕 영정(影幀)과 용왕신을 모신 왕룡사라는 암자가 있다. 북형산의 산정에 오르면 사방이 확 트였을 뿐 아니라 포항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 신라의 동북방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문무왕 13년(673)9월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정상부에 성을 쌓은 모습이 머리띠 모양의 퇴뫼형 형태로서 성의 둘레가 700m 정도 되며, 사면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성은 신라 통일기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관문성. 남산신성과 같은 석성과는 달리 토성 또는 토석성(土石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삼국시대 그릇조각과 고식 기와들이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문무왕 13년(673)에 쌓은 것이라기 보다 그 이전에 축성된 것을 이때 고쳐 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건물자리 2개소, 성문자리2개소가 남아 있고,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측되는 봉수대와 4각형 연못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 21권 경주부 산천조에 형산은 안강현 동쪽 21리에 있고, 신라 때에 북형산이라 불렀으며, 중사(中祀)를 지냈다고 한다.
왕룡사 김부대왕
형제산은 포항시와 경주시의 경제에 위치해 있다.형산강 어구의 남쪽에 북형산성이 있고, 김부대왕 즉 경순왕을 모신 용왕사가 잇는 산을 북형산(고려때부터는 '형산' 이라부름)이라고 한다. 형산강은 이 두 산 사이를 지나 포항으로 흘러 온다. 그런데 옛날, 형제산이 단맥되기 전에는 남천, 북천,기계천의 물이 안강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경주까지 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그래서 안강의 치수문제는 신라의 숙원사업 이었다. 경순왕 김부가 왕이에 올랐을때에는 후삼국이 일어나 서로 각축을 벌였을 뿐만아니라, 나라 안에서는 사방에서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이 극도로 문란해지는 등 신라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하여 백일간의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또 이를 막기 위해서 형산초의 산을 끊어 안강호수의 물을 어용사, 즉 영일만으로 흘러 보내면 임정현땅의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이에 경순왕은 태자 김충과 의논하여 백일간의 기도를 올리기로 하였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으로 삼층집을 짓고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왕실의 조종들에게 종묘사직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땅에서는 태자 김충이 형제산맥을 단절을 천지신명께 기도하였다, 태자는 기도 끝에 큰 뱀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용으로 불러 줘야만 용이 될 수가 있었다. 길가에 누워 지나가는 살마이 용으로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아무도 용이라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큰 뱀을 보고는 두려워서 달아나기만 하였다. 왕과 약속한 백일이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은 날이었다. 크게 낙심을 하고있는데 마침 한 노인이 손자를 업고 지나다가 큰뱀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저런 큰 뱀도이 세상에 있는가?"하고 말했다. 그때 업혀 있던 손자가 "할머니!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이에요"라고 했다 뱀을 용으로 불러 준 아이에게 안강호수에 물이 빠진후 생긴 땅과 그 일대의 논밭을 주고 들의 이름을 아이의 이름을 따라 유금들이라고 부렀다. 현재 강동면의 유금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 되었다.형산 산정의 왕룡사라는 절에는 갑부 대왕과 김충 태자의 목상을 세워 재항을 하고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