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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현 충암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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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金淨, 1486년 ~ 1521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문신으로,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504년 사마시에 합격해 150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관료로 재직 중 다시 정시에 장원급제하였다. 조광조와 미신타파와 향악 시행 등 개혁 정치에 힘쓰다가 기묘사화로 유배되었다가 사형당했다.

10세 전 사서를 통하고 1504년 사마시에 합격해 1507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언, 순창 군수 등을 지내고 담양 부사 박상과 함께 폐비 신씨를 복위시키고자 상소를 올렸으나 각하되고 유배당했다.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지제교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친 후 문신(文臣)들을 시험하는 '정시'에 다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정랑, 홍문관 부교리, 교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1501년 충청도 도사로 부임했다가 1512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교리, 이조정랑을 거치고 1513년 독서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후엔 벼슬을 사양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1514년(중종 9) 순창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가 죽자 그는 중종 반정으로 왕후자리에서 쫒겨난 신씨를 다시 맞아들이자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김정은 고향땅인 보은의 함림역(현, 보은읍 학림리)으로 유배되었다. 순창군수로 있던 중 그는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낳다가 산증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일부 조정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그러나 김정은 담양부사로 있던 박상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그리고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1516년 다시 등용되어 부제학동부승지도승지이조참판대사헌병조판서를 역임하고 조광조와 미신타파와 향악 시행 등 개혁 정치에 힘썼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몰락해 충청도 금산으로 유배,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위리안치(圍離安置)된 뒤, 사약을 받고 사사당했다.

폐비 신씨를 복위하는 데 적극 나서는 등 절의에 뛰어났다는 평가, 형조판서에 있을 때에 감옥에 수인(특히 출세한 천인)들이 넘쳐나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특별조사까지 받았던 무자비한 관료였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시화에 능했으며 문집에는 《충암문집》, 저서에는 《제주풍토록》 등이 있다.

​김정일대기

 어떤 훌륭한 이는 3세에 천자문을 떼었다느니, 하늘이 낸 천재라느니, 신동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는다. 부럽다기보다는 신기한 일로 여겨져 호기심이 동한다. 그런데 충북 보은군 보은읍 성족리에서 1486년(성종 17)에 태어난 김정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글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하도 신기하고 기특해서 할머니인 황씨가 3세부터 글을 가르치니  7세 때는 할머니의 병을 간호하는 의젓함을 보이기도 하고, 10세 전에 사서(四書)에 능통했으며 14세에 별시의 초시에 응시해서는 당당히 장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직 어리므로 더 이상의 과거는 보지 않고 꾸준히 성현의 글과 가르침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선대로부터 대대로 살아온 고향 보은에서 소년 시절을 이렇게 보내고 있던 15세 때 부친상을 당한다. 처음 당해 보는 충격이건만 어른스러운 침착함으로 예법에 따라 상을 치르고 모친을 극진히 봉양했다. 18세에 혼인을 했는데 회덕 계족산의 법천사라는 절에서 공부하던 중 거기에 머물고있던 송여해라는 어른의 눈에 들어 그의 조카딸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가 고향과 모친 곁을 떠난 것은 별시 갑과에 장원급제한 1507년(중종 2)봄이다. 그의 나이 22세로서 이때부터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한다.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지제교겸 경연 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친 후 문신(文臣)들을 시험하는 '정시'에 장원하고 병조정랑, 홍문관 부교리, 교리, 사간원 헌납 등을 지냈다. 비교적 순탄한 벼슬길이었다. 1501년에는 충청도 도사로 고향으로 와 근무하면서 그리던 어머님을 봉양하며 청풍 한벽루와 속리산 등 자연경관을 두루 유람한다. 1512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교리, 이조정랑을 거치지만 학문을 더욱 연마하기 위해 이듬해에 독서당에 들어갔고 얼마 후엔 벼슬까지 내놓고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여기까진 이렇듯 그의 길은 아직 잔잔한 물결이었다. 그러나

1514년(중종 9) 혁신적인 새 정치를 펴려는 사람들의 천거로 다시 그는 조정의 부름을 받고 순창군수로 부임한다. 이제부터 그의 앞에 파란과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첫 파란은, 이듬해인 1515년(중종 10)에 중종의 비인 장경왕후가 원자 호(뒤의 인종)을 낳고 승하하자 새로 앉힐 왕비문제로 일어났다. 일부 대신들은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의 박씨를 천거했다. 그러나 김정은 담양부사로 있던 박상과 함께 이를 반대했다. 숙의 박씨는 이때 복성군 미를 낳았기 때문에 숙의 박씨가 왕비가 되면 원자인 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중종 반정으로 왕후자리에서 쫒겨난 신씨를 다시 맞아들이자고 했다. 중종 반정은 1506년(연산군 12)에 성희안, 박원종 등이 폭군인 연산군을 쫒아내고 성종의 둘째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중종이 도게 한 사건으로, 진성대군이 왕이 되자 부인이었던 신씨도 따라서 왕후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 반정을 일으킬 때 신씨의 아버지인 좌의정으로 있던 신수근이 매부인 연산군을 위해 반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성희안 등에게 살해되어 역적으로 몰렸다. 이걸 가지고 중종 반정의 공신인 박원종이 역적의 딸인 왕후 신씨는 마땅히 쫒아내야 한다고 극구 주장하는 바람에 결국 폐비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를 이은 비가 장경왕후다. 이러하므로 신씨의 폐비는 부당했으며, 또한 신씨에게는 소생이 없으니 복위시키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상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씨 폐비를 적극 주장했던 박원종 등을 처벌해야 한다고 아울러 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 일로 하여 김정과 박상은 왕의 노여움을 사서 김정은 고향땅인 보은의 함림역(지금의 보은읍 학림리)으로 유배되었다.  순창(淳昌) 군수 시절, 같은 사림파인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비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중암 김정의 36년 생에 또한 피란만장했다. 신씨 복위 상소는 임금의 구언(求言)에 답한 응지상소이므로 죄를 묻지 않는 법이었으나, 훈구파가 죄 줄 것을 강력하게 주창해 옥에 갇힌 후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가 겨우 유배형으로 낙착되었다.

  김정은 보은(報恩) 함림역(含琳驛)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난 후 근처의 속리산 도솔암에 들어가 학문에 몰두했다. 고향 보은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던 중에 조광조 등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는 그를 부제학에 임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던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농사를 짓는 한편 경전을 연구하여 자기 수양에 몰두했다. 하지만 조광조가 함께 일할 것을 간청하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오자 결국 조정에 나아갔다. 그 때는 사림파의 전성기였으므로 그는 승승장구해 기묘년 여름에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정은, "젖내 나는 아이가 판서의 임무를 맞는다면 조정의 수치일 것입니다." 라면서 사퇴했다. 비록 수개월 후면 중종의 마음이 이들에게서 떠나가지만 이때만 해도 중종은 사림파를 신임할 때라서 그의 사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정 역시 개혁 정책을 펼치는 데 있어서 조광조에 뒤지지 않았다. 30대 중반의 소장 관료들이 정권을 잡고 펼치는 개혁 정책에 훈구파와 나이 많은 신하들은 내심 불만이 많았다. 더구나 이들에게 배척당해 쫓겨나거나 벼슬이 갈린 자들은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복수할 기회만 노리게 되었다. 결국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파가 신무문을 통해 중종에게 참소해 형세는 하루아침에 뒤바뀌고 김정은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겨우 사형은 모면하고 충청도 금산에 유배되었다. 금산 유배 시절에 김정은 병든 어머니를 보러 갔다가 도망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유배지인 금산과 고향인 보은은 약 백 리 떨어진 하루거리였으므로 김정은 군수 정웅(鄭熊)에게 병든 모친을 뵙고 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웅은 김정이 죄없이 유배온 사림파이며 도망가지 않을 사람임을 믿고 말미를 주었다. 유배 간 아들이 나타나자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유배중인 아들이 돌아다니다가 자칫 죄가 중해질 것을 두려워해 빨리 돌아가라고 일렀다. 그런데 그가 유배지로 돌아오는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그의 유배지가 진도(珍島)로 바뀌어 금오랑 황세헌(黃世憲)이 금강산으로 내려온 것이다. 금산 군수 정웅은 국가의 죄수를 사사로이 놓아 보냈다는 혐의를 벗기 위해 김정이 도망친 것을 잡아왔다고  고했다. 이 일로 인해 김정은 여러 차례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파로서 도망가려 했다는 죄명은 죽는 것보다 치욕스런 일이었다. 그는 옷자락을 찢어서 상소를 오렸다. " 신은 중한 죄를 지은 몸으로서 사정(私情)으로 말미암아 국법을 금했으니 그 죄는 심히 큽니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것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신을 도망했다고 하면 매우 원통합니다." 결국 김정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다. 제주에 도착한 그는 시 한수를 지었다.  근심과 병은 귀밑까지 이르고, 바람과 서리 차건만 옷  도 주지 않네. 생각하면 임금은 밝은 달인가, 하늘가에도 멀리 비치네. 김정은 억울하게 우배 되면서까지 중종을 그리워했지만 중종은 이미 그를 잊은 군주였다. 아니 이미 그의 정적 편에 선 인물이었다. 2년 뒤인 1521년, 그에게 드디어 사약이 내려졌다. 금산 유배 도중 도망했다는 죄명이었다. 사약이 내려오자 김정은 술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을 들이켰다. 형과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어 노모를 잘 봉양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곤 절명사(絶命辭)를 읊었다.

먼 섬에 버려저 고혼이 되는구나. 어머니를 남겼으니 천륜이 막혔다.
이런 세상을 만나 내 몸을 잃으니 구름을 타고 가 상제(上帝)를 찾을까.
굴원을 따라 높은 곳에 거닐까. 기나긴 밤 어둡구나 언제 밝을꼬.
붉은 충성 빛났거만 풀더미 속에 묻히구나. 당당하던 뜻이 중간에 꺾이고 마는구나.
오호라 먼 훗날에는 나를 슬퍼하리.
투절국혜작고혼 유자모혜격천륜

 끝내 자신을 버린 중종에 대한 회한일까? 어머니를 남김은 슬퍼해도 중종에 대한 구절은 없는 것이 이채롭다 하겠다. 그는 벼슬자리에 있을 때 자기 살림을 돌보지 않았고. 누구의 청탁도 받지 않았으며 그런 자들은 문에 들이지도 않았다. 녹봉을 받으면 친척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이런 처신에 대한 보답이 죽음이었으니 도(道)가 펼쳐지지 않는 세상에세 개혁 정책 펴기란 이렇게 어려운 일이다. 복재(服齊) 기준(奇遵)은 만 21세 때인 중종 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올랐다가 다음해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에서 응교(應敎)등의 직책을 맡은 젊은 사림파였다. 그가 종 3품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있을 때였다. 대궐에서 숙직하던 날에 꿈을 꾸었다. 함경도(北關)를 여행하는 꿈이었는데 험한 여로를 율시(律詩) 한 수로 읊었다.

 먼 변방도 강산은 고국과 같구나 하늘가에 눈물 흘리며 외로운 배에 의지했네.
밀물 소리 적막한데 관문(關門)은 닫혔고, 나뭇잎 떨어져 쓸쓸한데 성곽은 비었다. 들길은 가을 풀 밖으로 가늘게 뻗어 있고 인가(人家)는 멀리 석양속에 있구나.
만 리 길 가는 배 돌아오는 돛대는 없으니, 푸른 바다 아득한데 소식도 통할 수 없네.
문득 꿈에서 깨어났으나 시구가 생생해 벽에 적어 두었다. 기묘년 가을에 기준이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귀양 갔다가 함경도 온성(穩城)으로 이배되는데 온성으로 가는 길이 모두 꿈속에서 본 풍경이었다. 그가 꿈속의 시를 읊조리다 슬퍼 목이 메이자 종자(從者)들도 눈물을 뿌렸다. 기준도 김정이 죽은 1521년에 사약이 내려져 만 29세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현랑과에 장원해 직제학이 되었다가 사림파의 추천으로 성균관 대사성이 된 김식은 기묘년에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사약이 내려온다는 소식이 있자 마침 함께 있던 이신(李信)은 달아나라고 권했다.
"죄도 없이 간신들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유익한 일이겠소."
이신은 김식이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힘센 종 우음산(于音山)에게 업고 달아나게 했다. 하지만 금오랑이 군사를 풀어 추적해 포위망이 저점 좁혀지자 김식은 이신과 우음산을 보낸 후 혼자 목을 매었다. 그의 몸 속에 상소문과 시 한수가 있었다. [군신천세의]란 시였다.

  날은 저물어 천지는 어두운데 빈 산사엔 구름만 걸쳐 있네
군신은 천년의 의리가 있다 하는데 어느 곳에 외로운 무덤을 삼을까.
이들 외에도 김구 등 수많은 사림파들이 화를 입었다.

그러나 비록 현실이 훈구파의 것일지라도 미래는 사림파의 것이었다.

고봉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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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충북지방 기념물 제51호
지정년월일 : 1980년 1월 14일

정사는 대개 이름높은 선비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거나 또는 벼슬을 하다가도 향리나 경승지에 은거하면서 청소년들을 뽑아 학문과 수신의 도를 가르치던 일종의 사학교육시설이다.

이 정사는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문정공 원정 최수성 선생이 건립하여 문간공 충암 김정 병암 구수목 선생등과 한때 시를 읊으며 강학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원정은 당시 명망높은 학자로서 시문 서화 음률 수학에 뛰어났으나, 중종16년(1521) 신사무옥에 관련되어 사형되었으며,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충암은 형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병암은 이조좌랑을 지내고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 후 병암의 5대손 구일봉이 삼파연루봉 정상에 퇴락되어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소규모의 팔작집으로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귤림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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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1871년(고종8)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665년(헌종6)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고종 29) 김의정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을 기리기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1578년 (선조 11)조이후 판관은 충암 김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를 짓고 제사지내게 한데서 시초를 찾아 볼수 있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인 귤림서원에 모셔졌던 오현은 충암 김정 이외에 안무사 청음 삼사헌 동계 정온, 제주 목사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등으로,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했던 이들은 지방문화 발전에 적지않게 공헌하였다. 오현단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 - 45 cm, 너비 21 - 23cm, 두께 14 - 16cm의 조두석과 함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의 마애명과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상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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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명종4년)에 성제원이 이 고장 출신 기묘명현 김정의 위패를삼년산성내에 봉안하고 삼년성서원으로 창건하여 1610년(광해군2년)사액을 받았다. 1672년 (현정1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우고 대곡 성운 동주 성제원, 중봉 조헌, 우암 송시열등 4현의 위패를 추향하였다.1871년 (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될 때 강당은 보은 향교에 이건 오늘의 명륜당이 되었다. 그후 1892년 김세희 등이 옛터에 단을 만든후 1896년(고종 33년) 김문희등이 삼칸 띠집을 재건하였으며 1919년에 어윤원등이 지금의 건물로 고쳐 세운 것을 1971년에 보수하였으며 1986년에 해체 복원한 현재의 건물은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위에 덤벙 주추를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지붕은 맞배 지붕에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서원앞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묘정비각이 있고 1629년(인조2년)에 세원 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원량이 짓고 김종후가 썼다.

​성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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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악산 아래에 있는 서원으로 광해군 9년(1617년)에 세워져 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고려때의 낙천재 김신, 율정 윤택, 야은 길재, 조선시대의 충암 김정,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 등 여섯분을 모셨으나, 지 금은 고경명을 빼고 다섯분만 모시고 있다. (성곡서원이 있던 자리임.)

신항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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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선현을 봉향하고 자제들의 강학을 담당하기 위하여 창건된 신항서원(莘巷書院)은 조선 선조 3년(1570) 창건되어 경연·박훈·김 정·송인수를 모시다가 인조 20년(1642) 개건하면서 한충을 추향하고, 효종 1년(1650)에 송상현·이득윤 을 추향하고 효종 7년 (1656)에 이이·이색을 추향하여 현재 9분을 모시고 있다.  이때 까지의 명칭은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 하였으며 현종 1년(1660)에 사액되면서 신항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신항서원에서는 원생 30인과 자모생 30인을 뽑았으며 매년 음력 3, 9월 초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고종 8년(1871)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가 고종 29년(1892) 복구하도록 허가되어 광무 9년(1904)에 복구되고,  1957년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현재의 서원은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측면 1간으로된 맞배지붕의 단층 목조인데 전면에는약간의 공간을 두고 문은모두 4분합문을 달았고 이밖에도 강당과 삼문, 행랑이 있으며 건물주위에는 석 축담장을 둘렀다. 또한, 서원마당에는 숙종 11년(1685)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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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낸 충암(沖庵) 김정(1486∼1521)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선생은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론의 상호부조에 힘썼고, 향약을 전국에 실시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 있던 건물과 묘소를 1978년에 동구 신하동으로 옮겼다. 건물 안에는 인조 19년(164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

​충암문집

沖庵先生集(奎4935), 金淨(朝鮮) 著.

7冊(附錄合) 木板本 29.8×19.6cm.

四周雙邊 半郭:18.2×14cm.

有界 9行 18字.

版心:上下花紋魚尾.

 

沖庵 金淨(1486∼1521)의 詩文集이다. 金淨의 9세손 商協이 遺事를 모아 놓은 것을 商協의 아들 聖泰가 1845년(憲宗 11)에 간행하였다. 本集은 1552년 이미 金淨의 堂姪 인 應敎 金三守와 公州牧使 許伯琦와 힘을 합하여 刊行했던 것을 重刊한 것이다. 金淨 의 자는 元沖, 호는 沖庵, 본관은 慶州, 戶曹正郞 孝貞의 아들이다. 1504년(燕山君 10 ) 司馬試에 합격, 1507년(中宗 2)에 增廣文科에 장원하여 正言, 弘文館 修撰을 지내고 賜暇讀書했다. 그 후 兵曹佐郞, 吏曹正郞, 淳昌郡守를 역임하였다. 淳昌郡守로 있을 때 潭陽府使 朴祥과 함께 廢妃 愼氏의 復位를 상소하다가 報恩 含林驛에 流配되었다.

1516년 풀려나와 司藝 典翰으로 불렀으나 속리산에 들어가 독서에 몰두하였다. 뒤에 趙光祖가 執權하게 되자 적극 협력하여 都承旨, 吏曹參判, 大司憲, 刑曹判書, 藝文館 提學 등 중요관직을 역임하였다. 趙光祖를 도와 昭格署의 혁파와 鄕約實施, 小學普及, 賢良科의 실시, 靖國功臣濫參者의 追削 등 革新政策을 건의하여 실천에 옮겼다. 그러 나 1519년 己卯士禍가 일어나자 洪景舟, 南袞, 沈貞 등 勳戚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趙 光祖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錦山에 杖配, 다시 濟州에 安置, 賜死되었다. 詩文,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 報恩의 象賢書院, 淸州의 莘巷書院, 淳昌의 花山書院, 濟州의 橘林書院 등에 祭享되었다. 謚號는 文簡. 卷頭에는 申光漢의 序가 있다. 卷{1}:詩 99 수, 卷{2}:詩 205수, 卷{3}:詩 189수, 卷{3}의 詩 중에는 濟州島로 귀양갔을 때 쓴 「 海島錄」이라는 題名에 42수와 「聞見詩」에 20수가 포함되어 있다. 卷{4}:賦 1편(登 高丘賦贈朴君昌世將赴順天任), 祭文 152편(祭延昌府院君文, 北郊嶽瀆祈雨祭文 등), 辭 2편(洛沂辭, 臨絶辭), 墓碣銘 3편(順天府使金公??墓碣銘, 軍器寺判官兪公汝??碣石銘 등), 銘 2편(殷秀實擊朱??笏銘, 無絃琴銘), 歌謠 2편(경南薰歌, 迎新使歌謠), 跋 1편( 顔樂堂詩集跋), 序 4편(贈志悅上人序, 贈申洪之行序 등), 說 1편(釋守侃字보和說), 記 1편(叢石亭重修記), 辨 1편(女왜氏鍊石補天辨), 書 1편(答對馬島主書契), 敎 1편(諭慶 尙道觀察使金安國敎), 廉頗謝藺相如書, 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 濟州風土錄. 이 중 「 濟州風土錄」은 그가 濟州에 謫居生活하는 동안에 견문을 적은 것으로 濟州島를 이해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卷{5}:請復故妃愼氏疏, 辭同知成均館事及副提學疏, 請歸養 疏, 辭刑曹判書箚, 獄中疏, 論許氏臧獲及黃衡盧種疏 등의 疏箚, 孤峯亂藁 11箴, 書札 追錄 5편. 卷末에는 1552년(明宗 7)에 쓴 公州牧使 許伯琦의 跋文과 1637년(仁祖 15) 에 曾孫인 金聲發이 쓴 後記가 실려 있다. 第6冊은 年譜이다. 年譜序는 吳熙常이 1831 년(純祖 31)에 쓴 것이다. 年譜는 上·下로 되어 있는데 上은 실제 年譜이고 下는 附 錄으로 賜祭文 6편, 本傳, 神道碑銘幷序, 墓表陰記, 追記, 崇賢書院廟庭碑, 遺墟碑, 三印臺碑銘幷序, 判書井記, 莘巷書院奉安祭文, 花山書院春秋享祀祝文 등과 諸家記述 3 9則, 宋同春浚吉與宋尤庵時烈書, 金渼湖元行與兪相國拓基書, 諸家吟詠 27수(附 宋夫人 ??閭記, 義士金聲遠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本集은 己卯士禍연구나 道學政治의 內容 및 謫所인 濟州島의 風物을 알아 보는데 중요자료가 되리라 생각한다. 冊末에는 1845 년에 쓴 宋啓幹의 跋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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